오직 한국인만 이해하는 사랑 미국을 울린 서사

입력 2024-03-17 18:08   수정 2024-03-18 00:36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다. 나영과 해성은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둘의 관계는 나영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가며 갈라진다. 12년 뒤 우연히 SNS를 통해 재회하지만, 각자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멀어진다. 그로부터 다시 12년이 흐른 현재 해성은 나영을 만나기 위해 미국 뉴욕을 찾는다. 나영의 곁은 남편 아서가 지키고 있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이 자신의 실제 경험을 풀어낸 장편 데뷔작이다. 이민자 출신 감독이, 그것도 데뷔작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유태오, 그레타 리 등 한국계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이 로맨스는 세계 영화상 75관왕을 석권했다.

구태의연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인연’과 ‘전생’ 등 영화의 철학적 배경은 가볍지 않고, 카메라 구도와 소품 등 연극적 장치들은 정교하다.

뻔한 서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 ‘인연’이다. 나영은 아서한테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어엔 ‘인연’이란 말이 있어. 섭리나 운명을 뜻하는 건데,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해.” 인연 개념에 익숙한 한국 관객에겐 다소 유치할 수 있지만, 해외 관객이라면 신선하게 느낄 만한 대목이다.

언어는 달라도, 모든 사람은 잊지 못할 인연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터.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보편적인 지점을 아름답게 다듬었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소규모로 개봉한 이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북미 전역에 확대 개봉했다.

영화 마무리 부분 나영과 해성이 헤어지는 장면의 연출이 압권이다. 둘은 아무 대사 없이 1분가량 서로를 마주 본다. 이별의 슬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 등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극도로 절제된 연기로 풀어냈다. 감정이 무딘 관객이라도 눈시울을 붉힐 만한 장면이다.

영화를 분류하자면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자를 그린 디아스포라 갈래지만, 해성과 나영의 관계 속에서만큼은 아서가 외부인이다. 해피엔드를 기대하고 봤다간 먹먹한 감정만 가득 안고 돌아올 수 있겠다. 둘의 인연은 다음 생에서라도 닿을 수 있을까. 해성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장면은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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